부처님의 마음
등록일 : 2003-10-13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관찰하면 알 수 있을까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
부모님은 자식의 마음을 다 알지만, 자식은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다. 어른은 아랫사람의 마음을 알지만, 아랫사람은 어른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중생들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듣다보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알 수도, 뵈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불자들아
모든 중생이 진실로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거니와 만일 관찰하여 알고자 하면 두가지 인연이 있으니 하나는 눈으로 보는 것이요, 둘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금강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오안(五眼)이 있다고 한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그것이다.
육안(肉眼)이란 육신의 눈을 말하며, 천안(天眼)은 하늘 즉 천상인의 눈, 혜안(慧眼)은 지혜의 눈, 법안(法眼)은 이치의 눈, 불안은 부처님의 눈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몸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부처님일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안목이 있다면 좋은 사람과 좋지 않은 사람, 훌륭한 사람인지 아닌지,어른과 아이인가를 하는 행동을 보면 알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눈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입으로 하는 업을 보면, 곧 부처님인줄 알지니 이것은 들어서 부처님을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여래의 거룩한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여래의 미묘한 음성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몸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누군가가 더해서 내몰아친다 하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성품은 성을 내지 않으며, 욕심이 없으며,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들어서 아는 것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도 여의치 않다면 어찌해야 할것인가

불자들아 열매를 두가지 사람에게 비유한 것은 진실로 알기 어려우니라
알기 어려우므로 나는 말하기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느니라
함께 있어도 모르겠거든 오래 있어야 하며
오래 있어도 모르겠거든 지혜를 써야 하며
지혜로도 모르겠거든 깊이 깊이 관찰하여야 하나니
관찰하는 까닭으로 계행을 가짐과 계행을 파함을 아느니라
불자들아 함께 있고, 오래 있고, 지혜를 쓰고, 깊이 관찰하는 네 가지를 구족한 연후에야
계행을 가지고 계행을 파함을 아느니라
불자들아 계행에 두 가지가 있고 가지는 것도 두 가지니 하나는 끝까지의 계행이요, 다른 하나는 끝까지가 아닌 계행이니 어떤사람이 인연이 있어서 계율을 받아 가지거든 지혜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이 가지는 계행이 이양을 위함 인지 끝까지 가짐인지를 관찰할 지니라
불자들아 여래의 계율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끝까지의 계율이라 이름하느니라.

출세간 적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찌 나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사람 에게는 전혀 무관하겠는가. 어떤 이는 어렵고 힘들 때에 함께 하고자 하고, 즐거운 일을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무량심이라는 자비심을 드러내어 보살행을 행하는 이도 있다.
자신이 넉넉할 때에 잘 지내는 것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만, 늘 평상시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이양을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가치 있는 삶을 가지기 위해서 사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가에서는 최소한의 양식으로 최대한의 삶을 살아가는데, 최대한의 삶이란 이양거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불성을 놓치지 않고 내 마음을 가지면서 언제 어느곳에 있더라도 여여히 살아가는 것이다.

켄트케이스의 ‘그.래.도’ 중에서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은 해라
착한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마음을 주고 손길을 주고 발길을 내닫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열반이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해탈이란 번뇌가 끊어진 것이고, 중생이란 번뇌망상이 가득한 자리요, 부처란 본래가 번뇌망상이 없는 것이다. 라고 공부했지만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반이든, 해탈이든, 삶이든, 죽음이든, 행복이든 자기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 가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진실한 것이요 정직한 것이다.
고통은 존재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옥의 고통은 존재하지만 지옥에서 받을 고통과 괴로움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自是)요, 욕지내생사 금생작자시(浴知來生事 今生作自是)라고 하였다.
전생을 알고 싶다면 현재 나의 모습을 보고, 내생을 알고 싶다면 현재 내가 하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열반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청정무구한 자리로 다만 내가 알지 못할 뿐이다.
보살은 비록 나쁜 중생들의 상애함을 받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므로 여래는 끝까지 가지는 계행과 성취한 계행을 지녔다. 끝까지 흔들림 없는 규범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이양을 바라지 않고, 기도와 정진과 수행을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기도와 정진과 수행은 원하는 바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념을 지니게 해서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 할 수 있는 지혜와 힘과 용기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알기 어려운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이 보아야 하고, 많이 들어야 하는데, 보는 눈은 안목있는 눈이요, 귀는 열린 귀이어야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함께 있어야 하고, 그래도 모르겠거든 함께 있어야 하며, 함께 있어도 모르겠거든 오래 있어야 하며, 오래 있어도 모르겠거든 지혜를 써야 하며, 지혜로도 모르겠거든 깊이깊이 관찰하여야 한다. 관찰하는 까닭 그 사람이 여래인지, 어른인지, 불자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한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규범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속에서 살아야 한다.
평상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평상심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는 현실속에서 충분히 인식 할 수 있을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뽑기가 어렵지만, 뿌리가 얕은 나무는 흔들리기 쉽고, 흔들리는 나무는 결국 쓰러지게 되어있다. 고로 번뇌망상이 얕게 박혔다면, 신심과 원력이 깊이 박혔다면 태산준령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기도하고, 정진하고, 수행하는 불자가 되어야 겠고, 이양거리를 위한 기도와 수행정진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방영일
스님
법문주제
방송보기
2005-04-11 정우스님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
2005-03-21 정우스님 인연법(因緣法)
2005-03-07 정우스님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2005-02-17 정우스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2005-02-07 정우스님 불교는 보편성이다
[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