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심지 않음이 땅의 허물은 아니다
등록일 : 2003-12-12
그저께 인도 성지순례길에서 돌아왔는데, 이번 순례에서는 일행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도중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중 현지인들로부터 날씨로 인하여 약 일주일 가량을 히말라야 산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본인은 히말라야산을 꼭 보리라는 생각에 대한 확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구름에 가려 있을 뿐 히말라야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생각해 보았다.
오후가 지나면서 비가 한 두방울 떨어지더니 저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히말라야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머문 3일 동안 계속 히말라야를 볼 수 있었다.
히말라야 산은 언제나 그 곳에 히말라야로 머무는데, 구름이 끼면 못보고 구름이 걷히면 볼 뿐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아 수행정진을 통해서 무명업식이 걷히면 알음알이가 드러나 부처성품을 볼 수 있는 것이고, 무명업식이 구름처럼 가리고 있으면 못보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말씀을 모은 번역서 ‘죽음이 있어 삶이 행복하다’라는 책이 있다. 삶이 라는 것은 생로병사의 과정,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고 또 태어나서 떠나는 모든 반복되는 과정이 삶이요, 인생이요, 내 생활이겠지만 이것을 현상계에서 표현함이 죽음이 있어 삶이 행복하리라.
어느 스님은 “죽음이 한번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죽음을 표현할 길도 없고 죽음을 맛볼 일도 없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지어 진다면 의미가 없다.”라고 하였다.
달라이라마 스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함이 있는 말이다.
몇 년전 순례길에서는 북인도 깊은 곳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벼랑길을 10여시간 달린적이 있었다. 낯시간에는 풍광도 즐기며 낭떠러지도 견딜만 했지만 해가 지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이 되니 낭떠러지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다음날 아침에 그날의 심정을 글로 적었다.
“세상이 밝아오니 저렇게도 좋은 것을 어젯밤 히말라야 계곡길은 죽음의 공포였다. 어둠을 다스리는 밤의 신처럼 지혜있는 자의 용기가 필요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렇게도 좋은 것을 어젯밤 일은 지옥에 다녀온 기분이다. 밤의 어두운 길은 죽음의 공포만큼이나 불안하다.
인생도 알지 못하면 그와 같거니, 그래도 그 길에서 혜초를 만나고 삼장 현장을 만나다 나를 만난다.”
저는 요즘 이러한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에게 누군가가 존경심을 드러내서 가까이 다가올 때 겸손해 져야 한다는 것. 신이든 사람이든 추종자이든 다가올 때에 겸손해 져야 한다.
몇 해전 중광스님 생전에 스님께 차를 한잔 대접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평소에 남의 칭찬을 잘 하는데, 그날도 역시 누군가의 칭찬을 하는데 가만 들어보니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정색을 하고 “어떻게 자신을 칭찬 할 수 있는가?”하고 묻자.
스님은 “중광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나를 말할 수 밖에.”하였다. 시간이 지나니 이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아함경에서 신지행득(信知行得)이라 하여 믿음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계신다. 화엄경에서는 신해행증 이라 하여 믿음이라는 신심의 생명력으로 발심한 자는 엉컬어진 실타래 같은 업식으로 뒤엉킨 삶의 지표를 궤도수정 할 수 있는 그런 앎을 풀어 이해해서 행동하는 실천이 생활화 되면 그곳에 부처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믿음이 너무 지나치다면 즉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듯 인식능력 자체가 오염되기 쉽다.
어느 학자는 ‘맞는 것도 습관이 되면 스스로 맞을 행동을 해서 꾸지람을 즐긴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믿지 않는 의심도 문제이지만 앎이 없는 믿음도 큰 문제이다. 침묵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침묵은 진실하고 정직하다고 하지만 무관심한 침묵은 최악의 형벌이라 할 것이다. 침묵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말을 하되 말 같은 말, 정직한 말, 성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如來(여래)는 是眞語者(시진어자)며 實語者(실어자)며 如於者(여어자)며 不狂語者(불광어자)며 不異語者(불이어자)”라 한 그 참뜻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분별식심으로 가름하고 나름의 잣대로 가늠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유전하고 윤회하는 인과에 매어서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돌 수 밖에 없다고 하시며,
“불자들아 이 항하수 가에 사는 여러 사람이 모두 손과 팔을 가졌지만 저 강을 건너지 못하나니 모든 중생도 그와 같아서 불법승 삼보가 있고 여래가 항상 법의 중요한 이치를 말하여
여덟가지 성인의 도와 대열반이 있다고 하지만 중생들이 어찌 못하는 것은 나의 허물이 아니며, 성인의 도의 허물도 아니며 중생들의 허물이며, 번뇌의 허물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모든 중생들이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열반을 얻지 못하니라.
불자들아 마치 용한 의원이 병을 잘 알고 약을 말하여 주었지만 병든 사람이 약을 먹지 아니함은 의원의 허물이 아니니라.
불자들아 어떤 시주가 그의 있는 데로 여러 사람에게 주지만 받지 아니함은 시주의 허물이 아니니라.
불자들아 마치 해가 떠서 어둡던 것이 모두 밝아지는데 눈먼 소경이 길을 보지 못함은 해의 허물이 아니니라.
불자들아 항하사수의 물이 갈증을 제하지만 목마른 이가 마시지 아니함은 물의 허물이 아니니라.
불자들아 땅에서 여러가지 과실을 내는 일이 평등하여 다르지 않지만 농부가 씨를 심지 아니함은 땅의 허물이 아니니라.
불자들아 여래가 중생들을 위하여 십이부경을 분별하여 연설하지만 중생들이 듣지 아니함은 부처님의 허물이 아니니라.
내가 행동하지 아니하면 천하 없는 일도 다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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