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보편성이다
등록일 : 2005-02-07
불교는 보편성이며, 상식이며, 이성적이다.
반드시 이성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에 흐트러짐 없는 보편성이 결여되지 않는 종교이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이성적 탐구가 종교적 신앙을 해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적 신앙은 어떠한 이성적 공세에도 죽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티벳 말에 ‘이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믿음은 아무데나 흘러가는 개울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소나기가 오고 난 후 흘러가는 물을 보면 아무 규칙도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본인이 처음 단식을 해본 것이 72년도이다. 군입대를 앞두고 대식가였던 본인의 식사량을 줄이기 위해서 일주일간 단식을 했었다. 단식을 마치고 정상적인 식사를 하기 위해서 적응기간이 필요한데 선배스님이 콩을 갈아놓은 물이 좋다고 하여 대접으로 두 그릇을 마시고 난 후 무척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는 고생하지 않고 한해에 한 두 번 일주일 가량의 단식을 해오고 있다.
한번은 21일간 단식을 했던 적이 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이번에 한 비구니스님이 100일간 단식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8,000m 고지를 오르는 것에 견줄 만큼 힘든 고비 고비를 넘겼으리라 생각된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를 두고 정말 아무것도 먹질 않았을 것이라는 투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본인은 그들에게 “굶기보다 먹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마디를 해 주었다.
100일 단식의 후유증은 평생토록 완치되기 힘들 것이다.
그 스님의 행동에서 부처님의 하신 “네 유형은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임금은 아무리 못나고 어려도 왕이다. 수행자는 어려도 미천해도 수행자다. 불씨는 아무리 작아도 불씨다. 용은 아무리 작아도 용이다.’
생명은 아무리 미천한 생명이라도 생명인 것이다. 그 스님이 꼭 천성산만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도룡뇽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구는 허공의 한 공간 가운데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번 서남아시아 지진해일 구호성금을 전국의 각 사찰에서 모은 것이 15억 정도라고 한다. 이정도 규모의 성금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위성과 인터넷으로 현장의 모습을 보며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룡사, 여래서 및 각 포교당과 어린이집 등에서도 25일간 약 3,500만원정도 모금 하였다. 그 돈은 살아있는 자를 써져야 하겠지만 먼저 가신 분들로 인해서 모인 돈이기에 스리랑카대사관에 붓다월드(NGO)의 이름으로 전하고자 한다.
이후에도 초파일까지 2차로, 또 금년 말까지 3차로 보낼 것이며, 더 나아가 그늘진 이웃을 위해 해마다 마음을 내어 도울 수 있는 도량이 되길 바란다.

열반하신 통도사 전 종정이신 월하큰 스님께서 예전 구룡사 만불전 점안식날 글을 한 폭 써주신 것이 있는데, 그기에는 “진리무상미언설(眞理無相未言說) 일체만물무비통(一切萬物無非通)”이라 씌어있다. 일체 모든 일이 부처 뿐이다. 진리라는 것은 말 이전에 모양 없는 모양으로 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고 실상이며, 그 자리에서 비추어보면 일체만물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진정한 자비심은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 보다 마음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달라이라마께서 말씀 하셨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내면세계를 변화 시켜야 한다. 일신(一身)이 청정하면 일신이 청정하고, 일신 일신이 청정해지면 다신(多身)이 청정해지고, 다신이 청정해지면 국토가 청정해 지며, 국토가 청정한 그 자리가 불국정토(佛國淨土)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하면 가정이 변화하고, 가정이 변화하면 이웃이 변화하며, 이웃이 변화하면 사회가 변화한다. 사회가 변화하면 마치 이번에 모두가 서남아시아를 돕는데 동참하며 기뻐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정초기도를 마치고 방생기도를 갖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물고기를 많이 방생하고, 남방에서는 새를 많이 방생하곤 하는데, 본인은 그러한 방생 보다는 산에다 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먹이를 뿌려주는 법회를 가진다.
우리의 조상들도 배가 고파 산에서 내려온 짐승들 에게는 먹이를 나누어는 주어도 배고픈 짐승을 잡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선근(善根)이요 자비심이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방생인 것이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작은 선근 종자를 심는 것이 언젠가는 큰 자비심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불교는 보편성이요, 상식이다. 세상에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비구니 스님이 100일간 단식을 하여 많이 힘든 상황인데, 왜 좀 더 일찍 많은 사람들이 도우려 나서지 않았는지, 또 이미 벌여놓은 공사들은 어떻게 처리를 할 것인지, 왜 좀더 일찍 다양한 검토를 하지 않았는지, 너무 난개발로 인하여 국토가 신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히 철저히 남과 남이 만나 함께 생활하는 곳인 승가이다. 3~ 40년 전 허기를 견디지 못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내는 바람에 국토의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했을 때에 오직 승가에서 관리하는 산들만이 민둥산을 면할 수 있었다. 승가라고 해서 배가 고프지 않았겠는가 만 예부터 자연과 같이 어울려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 큰 태풍에 무너져 내리는데, 고찰에서는 피해가 없는 것도 자연에 어긋나지 않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살았던 승가는 자연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또 승가는 산지기가 되어 산을 지켜내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비추어 볼 때 상식적으로 이해되고 납득될 수 있는 일들이 절에서도 이해되고 납득될 수 있는 일인것이다.

욕심이 적은 것과 만족함을 아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러분들 만큼 살면 잘사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늘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인도 출가할 때에 가지고 나왔던 500원짜리 지폐와 절에 도착했을 때 남아있던 100원짜리 지폐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마음이 흐트러질 때에 그것을 꺼내어 보곤 한다. 물질이 풍요롭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물질이 넉넉할 때 불편한 것은 아니기에 타락하고 유혹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 정리하고 다음 생에 반복해서 전철을 밟고싶지는 않다. 그것이 잊지 말아야 하고 간직해서 오롯이 지켜야 할 심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배고픈 시절은 면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목말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욕심이 적다는 것은 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족함을 안다는 것은 적게 얻었을 적에 후회하거나 뉘우치지 않는 것이다.
보왕삼매론에도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면 의를 상하기 쉽다.”고 하였다. 의로울 의(義)자를 살펴보면 아름다울 미(美)자에 나 아(我)자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의란 나의 아름다움이다.
또 욕심이 적은 것은 하고자 하는 것이 적은 것이다. 노인(老人)이 노인이 아니요 게으름이 노인이다. 파거불행(波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인 것이다.
만족함을 안다는 것은 주위의 이들을 살피는 것이다. 불사(佛事)만을 위하고 마음의 근심을 가지지 않는다. 근심걱정이 없으면 늙을 일이 없다.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길에서 나서 한길에서 살다가 한길에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인데 금생에 나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느 생에 구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한 마음속에 만법이 들어있고 그 만법은 알음알이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고 마음밖에 진리 없고 마음밖에 실상 없으니 그것을 바로 보편성이라 하며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다. 우리들 모두가 이해되고 납득되고 실천하고 헤아릴 수 있는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잊지 말고 늘 가족들과의 어울림 속에 부처님의 제자된 것을 기뻐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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