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등록일 : 2005-03-07
불자들아 눈으로 보는 일이 있으니 부처님여래와 십주(十住)보살은 부처성품을 눈으로 보느니라. 또 들어서 보는 일이 있으니 모든 중생과 구주(九住)보살들은 부처성품을 들어서 보느니라. 보살이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부처성품이 있다 함을 듣고 마음의 믿음을 내지 아니하면 들어서 본다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눈으로 보아서 보는 이가 있고, 귀로 들어서 보는 이가 있는데 눈으로 보아서 보는 이의 경계가 더 높음을 말하고 있는데, 듣고도 마음의 믿음을 내지 아니하면 그것은 들어서 본다고도 할 수 없다.
화엄경에 오십이 위(五十二位) 지위점차(地位漸次)가 있는데,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다니는 구성이 입법계품에 나오고 있다. 그기에는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의 오십위와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합하여 오십 이위, 그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정각으로 오십 삼위가 된다.
여기에서 십주, 십행, 십회향은 삼현(三賢)이라 하여 현인의 지위에 오르며, 십주보살이 되었을 때 성인(聖人)의 지위에 오르며, 등각, 묘각, 정각에 올랐을 때 대성인(大聖人)의 지위에 오른다고 한다.
십주보살 이상이면 눈으로 본다고 하는데, 그 눈에도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오안(五眼)이 있다.
십주보살 의 십주란 발심주(發心住), 치지주(治地住), 수행주(修行住), 생귀주(生貴住),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정심주(正心住), 불퇴주(不退住), 동진주(童眞住), 법왕자주(法王子住), 관정주(灌頂住)이다.
관정주란 불자가 되어서 모든 것을 감당할 만 하므로 부처님의 지혜의 물로 정수리에 붓는 의식이다. 이렇듯 물과 관련된 의식은 인도 등지에서는 업을 씻어내는 행위로 간주되어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요, 부처성품은 항상한 것이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늘 변화하기 때문에 한결같지 못하고, 시비하고, 변별력이 없다.
황우석교수의 연구를 지지하는 글을 쓰던 중 영국의 자료를 접하게 되었는데, 영국에서는 유전병이 있는 여성이 아기를 갖고싶다면, 그 여성의 난자중 핵만을 추출하여 다른 건강한 여성의 난자에 핵을 대체하는 방법을 가능하도록 법안을 통과하였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주인은 핵이다. 핵씨가 주인인 것이다. 여기서 핵이란 부처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전체 중에서 핵이라고 하는 개념은 마음 중에서도 마음씨의 개념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씨라는 것은 종자이며, 종자는 바로 핵이다. 마음을 몸에 비유해 보자면 부처성품은 씨요 종자요 핵인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은 부처성품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육안만이 아니라 오안이 있음을 견주어 보면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시여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관찰해야 알 수 있겠나이까?”
“불자들아 모든 중생이 진실로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거니와 만일 관찰하여 알고자 하면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하나는 눈으로 보는 것이요, 둘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지난번 법문에서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번다한 이도 있고,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번다한 이도 있고, 몸도 마음도 고요한 이도 있고, 몸도 마음도 다 번다한 이도 있는데, 몸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몸으로 짖는 업을 맑혀 선업(善業)을 짓는 것이고, 마음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맑히는 것이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또 이 글은 우리가 발행하는 월간지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데, 매월 글을 쓸 때 마다 지난번에 어떤 글을 썼었는지 생각하면 새로이 한 글도 쓸 수 없었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과거에 어떠했었다는 것만 생각하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는 것이다.
아쉽고 미진한 것들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남은 시간을 잘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고마워 해야 한다. 육신이던 정신이던 내 것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지키도록 노력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행은 세밀하나 마음이 정당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은 세밀하나 행이 정당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도 세밀하고 행도 정당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도 세밀하지 못하고 행도 정당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어떤 인연에 의지해야 몸도 마음도 행도 오롯이 세밀하고 정당할 수 있겠나이까?”
사람에게는 두 유형으로 나누면 진실로 알기 어렵지 않다. 알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늘 함께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본인은 풀어서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말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행동하지 맙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을 쉽게 접근해보면 보편적인 생각과 상식의 범주에서 모든 이들이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는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함께 있어도 모르겠거든 오래오래 있어야 한다. 요즘 지방이나 외국에서 근무를 하는 이가 많은데, 마치고 돌아오면 가족들이 남처럼 느껴진다고도 한다. 그러나 늘 같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남자에게는 작은 공간이라도 혼자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함께 있어도 모르겠거든 오래 있어야 하고, 오래 있어도 모르겠거든 지혜를 써야 하고, 지혜로도 모르겠거든 깊이 내관사유(內觀思惟) 하여 관찰하여야 한다. 관찰하는 까닭으로 규범을 파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지니며 살게 되는 것일까?
수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근지혜(善根知慧)를 드러내는 자비심이다. 보살은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해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지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도를 닦거나 수행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고, 선지식을 가까이 하면서 살며,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불자들아 내가 예전에 한번은 사리불과 오백 제자들과 함께 마갈타국에 있었다. 그때에 사냥꾼이 비둘기 한 마리를 따라오는데, 그 비둘기가 무서워서 사리불의 그림자에 와서도 파초나무처럼 떨었고, 나의 그림자 속에 와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무서운 마음이 없어졌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끝까지 가지는 계행이 있어서 그림자까지도 이런 힘이 있느니라.”
사리불은 지혜가 가장 출중한 제자였다. 그러한 사리불의 그림자 속에서도 비둘기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부처님의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편안해 졌던 것이다. 마치 울던 아기도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 울음을 멈추고 편안해 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보면 뿌리가 깊어 뽑기 어려운 것이 있고, 뿌리가 얕아서 흔들리기 쉬운 것이 있다.
어느 광고의 카피에 ‘뉴욕의 숲에서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의 숲도 이미 우거져 좋은 숲을 가지고 있건만 왜 하필 뉴욕의 숲을 내세웠는지는 모를 일이다. 뉴욕의 숲에 가보면 쓰러져 있는 나무가 많다. 토양이 비옥하여 나무가 뿌리를 깊이 뻗지 않아도 자라나는데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눈, 비, 바람이 불면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흔들림 없는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비추어 보면 보이는 것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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