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법(因緣法)
등록일 : 2005-03-21
예나 지금이나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것은 같은 시간인데 어느날부터인가 시간의 속도는 탄력을 받은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누가 ‘세상 사는 재미가 무엇인가?’라 물으면 ‘재미없는 재미로 살고있노라.’고 대답하기 시작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재미없는 재미조차 없는 세상을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고 불현듯 사는 것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한다. 그것은 아마 사는 재미가 지루한 것 보다는 무료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늘 삶의 현장에서 리듬을 가지고 활력적인 요소를 지닌 인생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그 무엇인가에 크게 치우치고 얽매이고 빠져서 살았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그것을 우리는 집착이라 하지만, 나 안에서 변화되어가고 있는 그 존재 안에서 스스로 나라고 집착하면서 고집했던 내가 본래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요즘 세상을 살면서 세가지 큰 걱정이 있다. 한 사람은 자아(自我)에 도취된 사람, 자아를 망각한 사람, 자아를 상실한 사람이 그것인데, 세간에서 이야기 하는 자아는 어쩌면 참 나, 또 영원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진정한 참 ‘나(我)’는 아트만(Atman)이라는 자아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우리에게 팔만 장경의 가르침으로 설하신 의미이다.
석가여래부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 4월 초파일에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시고, 29세 되던 2월 8일에 출가를 하시고, 35세 때 납월 8일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45년 동안 우리와 더불어 사시며 일깨움을 주시다가 80되던 해 2월 보름에 쿠시나가라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께서는 탄생과 출가와 깨달음은 8일에 하셨고, 열반은 가득한 숫자인 보름에 드신 것을 보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라는 가르침을 통해 우리들이 삶의 목마름과 욕구와 욕망과 욕심을 충족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고기나 주고 목마름이나 해소 시키며 명성을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늘 대중들의 근기와 성향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취택하셔서 팔만 사천 방편문을 들어 법을 설하신 것이다. 아무리 심오한 가르침이라도 그 가르침이 그 어떤 사람에게 적절하지 못하다면, 또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다면 그 가르침은 약방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무상하고, 괴롭고, 스스로 자아라고 하는 것이 상일성(常一性)과 주재성(主宰性) 이 없어서 무아(無我)라고 하는 그 가르침에 한결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깨끗하지 못한 인생을 살고있는 그 자리에서, 그러면서도 흔들림 없는 한결 같은 자기모습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춘하추동(春夏秋冬), 만남과 헤어짐 등 일상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이라 하건만 하물며 부모형제, 처자권속, 이웃 등의 인연이란 어찌 한두 생의 인연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만해 한용운스님의 ‘님의침묵’이라는 시집에
“까마귀 검다 말고 해오라기 희다 말라, 검은들 모자라며 희다고 남을 소냐”라는 시가 있다.
한 구절을 첨가하자면 “할 일없는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하더라”라 해본다.
불교에서는 크게 선과 교로 나눌 수 있는데, ‘선시지 불이어 교시지어
선시지불(禪是之佛) 교시지어(敎是之語)’ 선이란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에 들음 이요, 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의 이정표를 봄이다. 눈으로 보고 아는 이가 있고, 귀로 듣고 아는 이가 있다. 눈으로 보고 아는 이의 경계가 귀로 듣고 아는 이의 경계보다 높다.
인도에 원숭이가 많은 절이 있는데, 그 절에서 스님들이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와서 한 마리는 눈을, 또 한 마리는 귀를, 또 한 마리는 입을 막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눈을 막는 이유, 귀를 막는 이유, 입을 막는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부처님의 법을 받은 가섭존자가 있다. 그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보살이 몇 가지 법을 구족하면 세상으로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고, 세상의 이치에 진흙탕에 핀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더럽혀지지 않겠습니까?”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가지 법을 구족하면 세상으로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고, 세상법에 더럽혀지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 열가지 란 첫째는 신심(信心)이요, 둘은 계율(戒律)이요, 셋은 선지식(善知識)을 친히 가까이 함이요, 넷은 안으로 잘 생각함이요, 다섯은 정진(精進)을 구족(具足)함이요, 여섯은 정념(正念)을 구족함이요, 일곱은 지혜를 구족함이요, 여덟은 바른 말을 구족함이요, 아홉은 바른 법을 좋아함이요, 열은 중생을 불쌍히 여김이다.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고 세상법에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이 열가지를 갖추어 나가면 되는데 그 방법으로 기도정진을 하고 염불정진이나 참선정진 등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유연하게 움직여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부처님의 말씀 중 “마음은 무상한 것이요, 부처성품은 항상한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마음씨가 바로 부처성품이다. 그런데 분별하고 시비하고 한결같지 못한 마음을 중생심이라 하고, 분별하지 않고 항상하고 시비하지 않고 변별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부처성품을 지니고 있고 마음씨가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불교에는 사념처(四念處)라는 말이 있는데,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이 그것이다.
첫째 신념처(身念處). 이 몸에 대한 본성을 알아야 한다. 이 몸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이 몸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육신은 늘 변화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깨끗할 수 없는 것임을 관하여야 한다.
둘째 수념처(受念處).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이라고 하는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오욕락(五欲樂)을 참 즐거움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심념처(心念處).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상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마음을 관할 때에는 마음은 늘 변하는 것임을 관하라는 것이다.
다섯째 법념처(法念處). 앞의 세 가지 외에는 실제로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고, 나에 속한 모든 물건이 내 물건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불자들아 지혜있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마땅히 이런 번뇌를 멀리 여의고 다시는 이러한 나쁜 일을 짓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내가 지금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의 업보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며, 내가 만일 도를 닦으면 그 힘으로 인하여 여러가지 괴로움을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불자들아 이 사람이 이렇게 관찰하고는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이 미약하여질 것이며,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이 가벼워짐을 보고는 마음이 기쁘며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이렇게 되는 것이 모두 도를 닦은 인연의 힘이니, 나로 하여금 착하지 아니한 이치를 여의고 선한 법을 친히 가까이 하게 할 것이며, 그렇게 하여 현재의 바른 도를 보게 될 것이니,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야 하리라 하며, 이 사람이 이렇게 부지런히 도를 닦은 힘으로 한량없는 나쁜 번뇌를 여의며 지옥, 아귀, 축생등 육도의 과보를 여읠 것이니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늘 정진하여야 하고,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달라이라마께서도 “무엇이던지 많이 가지려고 하지 말아라. 너무 무리하게 애쓰지 마라. 그기에 진정한 의미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만족감에만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적절한 행위인가 하는 것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일 것이다. 어제도 열심히 산 사람이 되고, 내일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게 하는 것은 정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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