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이고 누구이어야 하며 누구로 살고 있나
등록일 : 2005-06-09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자들이여 보시를 행할 적에는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할 것이며, 또 보시할 때에는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마치 부모가 병든 자식을 돌보듯이 할 것이며, 보시를 행할 적에는 마음이 기쁘기가 자식의 병이 쾌차함을 보는 것과 같아야 하며, 보시한 뒤에는 마음 놓기를 마치 부모가 장성한 아들을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음을 보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다.
저는 불자들과 공부를 하면서 지혜가 있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을 조건 없이 사는 것에 반해 어리석은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살며 조건 없이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부처님께서 성불한지 20년쯤 지나서 왕서성에 있을 때에 여러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대중 가운데에서 누가 능히 나를 위해서 여래의 가르침인 12구경을 받아 지니고 좌우에서 필요한 일을 해 주면서, 그러고도 자기의 좋은 이익을 잃지 않겠느냐?”

본인이 발행하는 월간지에 이러한 글을 썼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며,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로써 어울리는 것은 바람직 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대신 살아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 정행사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곳의 젊은 스님들이 어른 스님들의 가르침이 잔소리로 들리고 또 그것 때문에 힘이든다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본인은 그들에게 “나의 경험이다. 이제 나에게는 잔소리를 해줄 어른이 아무도 없다. 나에게 지적해주고 일깨워주고 격려해줄 어른이 이제는 없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본인의 은사스님께서는 28년전 세상을 떠나셨으며, 그 뒤로는 은사스님의 스승이신 故월하큰스님께서 마치 정반왕이 아들인 고타마싯달타가 출가한 후 남겨진 어린 라후라를 보살피듯 보살펴 주셨었다.
스승님은 개울에서 빨래를 할 때에는 항상 대야를 가지고 가셨다. 물이 충분히 흘러도 꼭 대야에 받아서 빨래를 하시고 그 사용한 물은 반드시 땅에다 부으셨다. 흘러가는 물도 아껴 쓰시고, 환경을 소중히 여기시던 그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부처님께서 라후라를 출가시키시고 제자로 맞아 함께 지냈는데, 얼마후 라후라를 불러놓고 양은대야에 물을 받아와서 발을 씻겨주셨다. 기뻐하는 라후라에게 부처님께서는 물으셨다. “이 대야의 물을 먹을 수 있겠느냐?”라후라는 먹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물을 부어내시고 또 물으시기를 “여기에 밥을 담아주면 먹을 수 있겠느냐?”
라후라는 먹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양은대야를 던져서 찌그러뜨리며 라후라에게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꼭 발씻은 양은대야에 밥을 퍼놓은 것 같고, 네가 잘못되었을 때에 너를 바라보는 것이 마치 찌그러진 양은대야를 보듯 하는구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라후라는 크게 깨우쳐서 이후로 평생동안 누구에게도 책잡힐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후 밀행(密行)제일 라후라존자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환경운동이나 인권운동 등 재가활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 물론 고마운 마음이지만 가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할 때도 있다.
누군가 급해서 실수로 길가에 변을 보았다면 가장 지혜롭고 바람직한 방법은 흙이라도 퍼와서 덮어주는 것이다. 그도 아니면 실수를 이해하고 그냥 지나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소멸될 것인데, 틈만 나면 실수를 한 이를 욕하며 그것을 휘적거리는 이는 어리석은 이라 할 것이다. 물론 고름을 놔둔다고 살이 되고 피가 되지는 않지만 짜내어야 할 때에 짜야지 섣불리 짜다가는 상처가 더 커지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스님의 칼럼을 보게 되었는데, 제목이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다.’였다.
간략히 내용을 소개하자면 ‘내가 어렸을 적에 넘어지고 다치고 싸워서 맞고 오면 어머님은 항상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다.”고 하셨다…. 자유롭게 살고싶다면 마음을 바꾸어 가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하여야 한다…. 십대의 자식이 반항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다.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이른 아침 시끄러운 자명종 시계소리에 깨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백년이 넘게도 사실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이 있으셨건만 80만 사시고 가셨는데, 정녕 열심히 사신 분이기에 나머지 20년 만큼의 복덕과 지혜를 상속으로 남겨주신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을 지어야 한다. 나눔을 통해서 덕을 닦고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헬렌 니어링(1904 뉴저지생)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에서 발췌한 글이다.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무거운 짐 일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할 것이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무상하고 허무해서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뜬구름과 같다. 허황된 얘기에도 초심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속지 않는다. 그것에 현혹되다 보면 속기 마련이다.

보시를 하라고 하면 어떤 이는 도둑을 맞거나 사기를 당하고 나서 하는 말이 “보시한 요량 치자, 공양 올린 요량 치자” 한다면 맞는 말이겠는가?
업은 자신의 의지가 작용하고 실천된 것만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모르고 밟은 생명이 죽었다면 그것은 무기업(無記業)이다. 반면 의지를 작용하여 생명체를 죽였다면 악업(惡業)이다. 모기가 피를 빨 때 무심결에 반사적으로 쳐서 죽였다면 무기업이며, 모기를 인지하고 잡을 마음으로 쳐서 죽였다면 악업이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듯, 누가 나를 위해서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만 부모와 자식간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형제와 형제간에, 이웃간에 자신이 할 일은 다 하면서 도와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의 도리를 하면서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뱀에 물렸다면 치료를 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뱀을 잡으러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기도를 할 것인가. 보편적인 생각으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 기도를 열심히 하는 을 보면 대체로 부지런하다. 살림살이도 하면서 봉사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려면 부지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사는 것이다. 덕이 있다는 것은 나눔을 통해서 베풀어 나타나는 현상이고, 복이 없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 곤궁하고 장애가 많기 때문에 복을 짓기 힘들다. 복이 있는 이는 지혜가 있어 복을 짓는다. 지혜가 없으면 덕이 없다. 복덕과 지혜는 둘이 아닌 것이다. 복덕속에 지혜가 있고 지혜 속에 복덕이 있다. 지혜가 있는 이는 조건 없이는 살아도 무조건 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장애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전생에 살아온 모습이 오늘의 내 모습이라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다음 생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많은 시간들을 살아 왔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남은 시간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신심이라는 생명력으로 확신을 가지고 발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도리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생활불교인이 되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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