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이고 누구이어야 하며 누구로 살고 있나(2)
등록일 : 2005-06-14
‘물은 젖는 성품이 있어 그릇의 방원(方圓)에 따르고 사람은 벗의 선악(善惡)을 본 받는다.’고 하였다. 범부중생인 우리들도 본성의 자리야 무차별하지만 현상계에서 보면 늘 변화무쌍한 자리이기 때문에 주변의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변화되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염불을 잘 하시는 스님이 신심을 가지고 신명나게 염불을 하면 전 대중이 신명이 나서 염불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지난 법회를 마치고 공양간으로 가는 길에 어린 학생이 있어서 “어린이법회가 끝이 났느냐?”고 물으니 그 아이는 어른들과 같이 법회를 듣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본성의 자리인 성품이니, 마음이니, 자성이니, 불성이니 하는 그 자리는 제법공상의 공의 자리는 있는 그대로인 자리이다. 물질의 세계인 색의 자리는 있는 현상을 의미 하는 것이다.
본인이 초등학교 4학년 봄소풍으로 갔던 서해 바닷가의 자그마하지만 유서깊은 망해사라는 절에서 그 절의 유례를 듣고서 출가하고자 하는 원을 세우게 되었었다. 그 때는 출가를 하면 도인이 되는 줄 알았었다. 출가한 이후에는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드높여서 무속적이고 미신적인고 우매한 중생들을 일깨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100%라는건 없는 것이, 무속인이나 사주팔자를 봐주는 이들 중에 본인을 의지해서 신심을 키우고 생활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그들을 찾아온 이들 중에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가 필요한 이들을 구룡사로 갈 것을 권한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게 되었다. 마치 아이가 반항하는 것이 바깥에서 떠돌면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있다는 것처럼.
법정스님의 영혼의 모험이라는 수필집을 보면 ‘조약돌과 설해목(雪害木)’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약돌은 정으로 갈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물이 스치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설해목은 톱이나 도끼로 찍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솜틀 같은 함박눈이 모여 나무를 꺽어 생긴 것이다. 옛 글에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다. 뛰는 벼룩을 길들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뛰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될것이다.
내 인생은 결국 내가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선근이 있고 지혜가 있고 좋은 인연을 맺으면 어울림이 좋게 된다. 대만의 불광산사의 성운대사를 만나고 또 배운 것이 있다. 불광산사에 작은 프랭카드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는데, 하나는 좋은 일을 하면서 삽시다. 두 번째는 좋은 대화를 나눕시다. 세 번째는 좋은 마음으로 삽시다.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행동하지 말자는 뜻일 것이다.
크고 작은 것이 진리의 세계에서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하듯 티끝 속에 시방법계가 다 들어간다. 심심심이 난가심(心心心 難可尋)이요, 관시에 변법계(寬時 偏法界)하고 착야에 불용침(搾也 不容針)이라. 마음은 변득이 심하여 만나기 어렵지만 그 마음을 넓혀보면 우주가 다 담겨있어도 보이질 않고 좁기로 하면 바늘 끝 하나 용납할 자리가 없다.
중생은 부처님의 지혜를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찌 그리도 어리석고 미혹해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우리는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었고, 인연이 다하면 그 만남은 생기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도 결국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는 이치인 연기법을 깨우치신 것이다.
일전에 대만의 불광산사에서 사진전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식사을 하게 되었는데, 재료는 두부이지만 생선의 모양에 생선의 비릿한 냄새와 맛을 내는 향신료로 만들어진 음식이 나왔길래 짐짓 물어보았다. “이 음식은 생선의 모양과 맛과 향을 지니고 있으니 생선과 무엇이 다릅니까? 인간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로 판단해보면 틀림없는 생선이 아닙니까?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다.”고 하자 안내를 맡았던 스님이 “다음부터는 이러한 음식을 만들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허구적인 것 허망한 것들을 허망한 것으로 느끼지 못하고 영원한 것인 것처럼 알며 살고있는 것이 많다.
약 1000년전 티벳의 성자인 밀라레파(Milarepa)는 ‘은둔자의 수행처는 부처님 가까운 곳에 있다. 나는 거기서 공덕을 실천하고 닦고 있네, 재산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갖고 싶기에 나는 집과 고향을 멀리 떠나 경계 말뚝 사라진 부처님 도량에서 신심과 진실한 수행자로 진리에 매진하네, 벗들과 가족, 걱정과 근심거리 때문에 나는 멀리 떠나있네.’라는 글을 남겼다.
본인은 오늘 법회를 마치면 속리산 법주사 옆 공림사로 갈 것이다. 오늘이 탄성큰스님의 기일인데, 어릴적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일찍 출가하여 세속의 정을 별로 느끼지 못할 때에 아버님의 얼굴을 떠올리려면 스님의 얼굴과 겹치곤 했었다. 그만큼 자상하신 스님이셨다.

부처님께서 “자세히 들어라 불자들이여 내가 성불한지 20년쯤 지나서 대중가운데에 누가 나를 위해서 능히 내가 가르친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좌우에서 보필하면서도, 그러고도 자기가 자기의 좋은 이익은 잃어버리지 아니할 자 있겠느냐?”고 물었다.

어느 어디에선가 ‘나는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고도 가족들과 친구들과 친지들과도 어울린다.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저녁도 먹고 시간도 함께 가지고, 그리고 나는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라는 글을 본적이 있다. 그리고 무척 공감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본인은 특히 노부부가 100년 해로하면서 산책하는 모습, 절에 같이 오는 모습, 어린 손자를 데리고 절에 다녀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복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나 덧붙이자면 여행을 떠날 것을 추천한다. 굳이 해외로 갈 필요도 없이 명산을 찾아가면 대찰이 있기 마련이다.

위의 부처님 말씀에 500여명의 제자들이 대답을 하였는데, 먼저 교진녀가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대는 이미 늙어서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할 터인데 어떻게 나의 시중을 들겠소?”하였다.
이어 사리불, 목련 등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 들이면서 보필하면서도 자신의 좋은 이익을 잃어버리지 않겠노라고 여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모두 적절치 못한 이유를 설명하여 사양하셨다.
그러자 목련이 선정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뜻을 살펴보니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를 마음에 두고 계신 듯 하였다. 그래서 대중들이 아난을 찾아가 부처님의 뜻을 설명하니 아난은 부득불 거절을 하였다. 스스로의 그릇이 그러하지 못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중들이 권하자 아난은 “꼭 제가 해야 한다면 부처님께서 저의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부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세가지 청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아난이 대답하기를 “부처님께서 설사 낡은 옷을 주셔도 저는 받지 않을 것이오니 그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부처님께서 시주가 별청을 하였을 때에 따라가지 아니함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출입이 일정한 시간이 없음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이를 듣고 “선재 선재라 아난비구는 지혜를 구족하여 미리 혐의가 있을 것을 보았도다.”하시며 이를 허락하셨다. 아난은 이때부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까지 약 25년간을 시봉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아난은 여덟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구족하였다. 한번도 별청에 따라가지 않았고, 한번도 나의 헌 옷조차 받은 적이 없고, 나를 시봉한 이후로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때 아닌 때에 나에게 온 적이 없고, 부처님이 왕이나 장자들을 만날 때에 그런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번뇌를 구족한 일이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 지니되 한번 들은 것은 다시 묻지 않았다. 마치 병에 든 물을 수전증이 없는 사람은 옮겨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아난이 나를 시봉한 이후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혜는 얻지 못했어도 부처님이 트시는 선정은 늘 알고 있었고, 모든 이른바 원하는 바로 다 이루어지는 지혜는 얻지 못했으면서도 중생들이 부처님께 와서 무엇을 묻고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을 알아서 적절하게 부처님과 만나는 시간을 조정해준 일이 있고, 나를 시봉한 이후로 부처님의 비밀한 말을 다 알아서 서사하여 기록으로 남겨 전승되어오도록 하는 많은 일을 하였다.”하시며 또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난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첫째는 신심이 견고하고, 둘째는 마음이 질직하고, 셋째는 몸에 병고가 없고, 넷째는 항상 부지런히 정진했고, 다섯째는 기억하는 마음을 구족했고, 여섯째는 교만한 마음이 없고, 일곱째는 선정과 지혜를 성취했고, 여덟째는 들음을 따라서 생기는 지혜가 구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부처님)를 시봉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잃지 않았다.” 하셨다.
이를 우리들은 생활불교 속에서도 어른을 찾아뵙고 문안 드리면서도 시간을 잘 맞춰서 때에 따라 찾아뵙는 이치는 잘 알것이다. 하루에 12시간을 일하면서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함께 할 수 있다. 하루에 1시간도 일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메여 있는지 어디에 처해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자신도 못 찾고 보지 못하는 이가 자신의 가족은 어찌 찾고 보고 살 수 있겠는가.
좋은 일 하면서 살고, 좋은 말 하면서 살고, 좋은 생각 하면서 살아가는 불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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