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구함
등록일 : 2005-10-11
부처님께서 화엄경에서 이르시기를 “보살에게는 네 가지 선행이 있다. 첫째는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는 것, 둘째는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 셋째는 가르침을 따라 능히 실천하는 것, 넷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다.”라 하셨다.
결국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중생과 살아가면서 이바지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종범스님의 법문에서도 ‘나의 행복은 나 혼자서만 만들어 내는 것도, 나 혼자서 얻어지는 것도, 나 혼자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다른 이의 도움도 많이 필요하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때에 비로소 나의 행복이 온전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중생이 나고 죽는 것을 좋아하면서, 나고 죽는 것을 위해 선업(善業)이든 악업(惡業)이든 짓는다면 이 사람은 번뇌망상을 끊거나 여의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를 일러 나왔다가 도로 빠진다 하느니라.” 하셨다.
“태어나는 것을 보면 마침내 죽음이 있음을 알고 슬퍼하라. 그러나 죽음을 겁낼 것은 없느니라”는 영가대사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추어 보면 나고 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중생이다. ‘사는 것이 이런 것이려니…’하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느니…’하며 이것을 즐기고 끊임없이 반복해 가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선한 업을 지어 좀더 좋은 곳에 태어나도, 나쁜 업을 지어 나쁜 곳에 태어나도 어딘가에 태어나는 것은 사실이므로 캄캄한 생사바다를 돌아다니면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락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돌아가며 살고 있으니,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었더라도 다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과 섞이면 이 사람은 또 과보를 받고 인과응보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을 살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하며, 선근과 자비가 근본이 되어야 보살행이 되는 것이다.
믿음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심을 드러내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자들아 이 사람이 이렇게 세가지를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보시도 구족하지 못하느니,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물질의 보시오, 둘은 법 보시니라. 이 사람이 비록 재물로 보시는 행하지만 구함이 있는 연고며, 비록 가르침으로 보시 하지마는 구족하지 못함이 있으니 왜냐하면 감춤이 있음을 말하지 아니함이며, 다른 이가 이길까 두려워하므로 보시가 구족하지 못하다 하느니라.”하셨다.
믿음에 두 가지가 있다 하였다. 하나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구함이라 하였다. 물질적으로 보시를 하면서도 구하는 것이 있으면, 또 법보시를 하더라도 다 주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혹 다른 이가 나를 이길까 두려워 구족하지 못한 법보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의 보시나 법보시에도 각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스러운 보시이며, 다른 하나는 성스럽지 못한 보시이다. 성스러운 보시는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보왕삼매론에서도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면 의(義)를 상하기 쉽다.’고 하였다.
법보시를 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는 유(有)를 증장하기 위해서 즉, 아는 소리를 한다거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발심해서 또는 누가 거들어 주어서, 또는 누구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기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내서 하는 일도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필요한 일을 내가 필요하기에 해주는 일도 있고, 상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장님이 밤에 등불을 들고 밤에 나갔다. 장님에게는 등불이 필요 없지만 어두운 골목길에서 눈뜬 이에게 부딪힘이 없도록 배려하기 위해서 들고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길을 가던 중 부딪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님이 물었다. “이렇게 등불을 들고 있는데 어째서 부딪히는 것이요?” 그러자 상대방이 말하기를 “등불이 꺼졌습니다.”하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나름대로 잘 챙겨서 상대에게 배려를 한 것 같은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가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를 해놓은 장치들을 보게 되지만 우리가 직접 도와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캄캄한 밤에는 눈이 먼 장애자가 눈이 멀쩡한 우리보다 훨씬 더 잘 걸을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 눈먼 장애자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만 보고 다른 반쪽은 보지 못해서 그 사람을 장애자고 보고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낮과 밤이 뒤바뀌면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이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하였다. 늘 자신의 등불을 밝힐 수 있도록 우리 불자들은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불교학을 공부할 때 반야지(般若智)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지혜가 있어야 그 나머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을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조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것을 보살행이라 하고 자비행이라 하며 지혜의 덕목이라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무조건 살면서 그것을 보살행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 보면 육바라밀에 대해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내관사유라는 선정삼매를 통해서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내관사유라는 선정이란 집착해서 머물 마음이 없는 것이다. 공의 자리가 바로 선정삼매의 자리이다. 그러한 선정은 진지한 정진을 하여야 한다. 또 진지한 정진이란 마음이 경계에 집착하는 모습으로부터 벗어난 자리이다. 진지하게 사는 것은 인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또 인욕이란 슬프고 괴로운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욕이란 슬프고 괴로움 그리고 기쁘고 즐거움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이 다칠 것이 없는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인욕은 지계정신인 규범과 규율속에서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어야 한다. 또 이는 나누는 보시가 없어서는 또 되지 않는다. 보시는 번뇌를 버리는 것이다. 번뇌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므로 이러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이 보시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보시를 하면서 구할 것이 없고 감출 것이 없는 것이다. 구하는 것이 있고 감추는 것이 있어서는 보시가 구족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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