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처님께 축원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구룡사(九龍寺)에서, 한 가정의 네 사람을 따로 축원기도를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승진을, 큰 아이는 고시를, 작은 아이는 재수를 하는데 수능을 위해, 또 막내 아이도 입시생이기에 수능을 위해서 올린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집은 주소는 다르지만 형제자매 사이인 듯 보이는 이들의 축원기도가 5장이 연이어 있는 것도 보았다. 이것은 다섯의 가족이 같이 하나씩 올린 것일까 아니면 어머님이 한꺼번에 다섯 자녀의 축원기도를 올린 것일까. 우리네 어머니들이나 가족들이 아이들이나 가족들을 위해서 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입시기도에서도 10시간 가량을 뼈가 저리도록 기도를 하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끝까지 마치어내는 어머니들을 보았다. 오늘 발견했다는 것은, 어느 한 분은 아이가 속해있는 고등학교의 한 학급 전체를 위해 기도를 했고, 또 어느 한 분은 아이가 속해있는 학교의 3학년 전체를 위해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생각은 단순할수록 좋고, 지혜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좋고, 행동은 분명한 것이 좋다. 그래서 우리는 인자한 선근의 힘으로 살아가는 공부를 늘 해오고 있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허망한 생각이나 허망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추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은 어떠한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한다. 지난 시간에는 보시란 번뇌를 버리는 것, 번뇌를 끊는 것, 번뇌를 놓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했었다. 예전에 수미산 순례길에서 느낀 것이 있는데, 평소에 어른들의 가르침이나 함께 공부하는 불자들에게 말하기를 ‘집착과 욕심을 놓아라, 비워라, 벗어라’고 해 왔었는데, 그 순례길에서는 입고있던 겉옷이 답답해서 벗어 드니까 무지 무겁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다시 껴입으니까 답답하긴 할지언정 훨씬 편하였다. 우리는 세상을 한쪽으로만 보는 경향이 많다. 편견이라고도 하고 편파적이라고도 한다. 일전 신문에서 본 글인데, 대법관을 퇴임하시는 법조인께서 남기신 말이다. “법원의 법관은 보수냐 진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재판의 판결을 어떻게 하느냐가 그에게 필요한 덕목이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 십년 살아오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훈습으로 익혀온 것들이 있다. 본인은 지금도 아이들이 왼손으로 수저를 사용하는 것을 나무란다. 오른손이 바른손이고 왼손은 그른 손이라는 개념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동양문화에서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식 식사법에서 양손을 다 사용하는 것에 옳다 그르다고 말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생각이 단순한 것이 좋고, 지혜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좋고, 행동은 분명한 것이 좋으므로 보편적인 사고로 어울림을 하는 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역관(逆觀)과 순관(順觀)으로 보면 수학공식처럼 약속되어진 숫자놀음이 아니라 그렇게 약속되었더라도 숫자놀음을 할 수 있는 여백을 들여 보면 무한대로 비어져 있는 공간을 보게 된다. ‘심심심이 난가심(心心心 難可尋)이요 관시에 변법계(寬時 偏法界)하고 착야에 불용침(窄也 不用鍼)이라.’ 마음을 마음이라는 마음은 그 마음을 붙들고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마음을 넓게 가지면 우주가 다 마음속으로 들어와도 자리가 남고, 그 마음을 좁게 가지면 바늘 끝 하나도 용납할 자리가 없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머물며 살아야 하겠는가? 얻는 것은 쉽지만 지키는 것은 어렵다 하였다. 조금 얻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마음속에 모든 것을 찾아 지니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행덕목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오대산에 계시던 한암선사께서 통도사에 계시던 경봉스님께 보내신 글이다. ‘범부중생들은 보이는 모양에 취하고, 도를 닦고 수행정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마음에 취해있다.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 참된 법인데 한쪽에 치우쳐 있다. 분상으로 나타나는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그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요즘 여러분께 ‘무심지심(無心之心)이 진심(鎭心)’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분별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심(無心)인데, 그 무심이 참 마음이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자신의 변별력에 의해서 드러나는 생각의 망념으로 비롯되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불자들아 어찌하여 이것은 보시요, 이것은 바라밀다가 아니라 하는가. 달라는 이가 있음을 보고야 주는 것은 보시요 바라밀다가 아니니, 달라는 이가 없는데도 마음을 내어 스스로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다라 하느니라. 만일 때때로 주는 것은 보시요, 바라밀다가 아니거니와 항상 주는 것을 보시바라밀다라 하느니라. 만일 다른 이에게 주고는 도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보시요, 바라밀다가 아니니 주고도 후회하지 아니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시바라밀다라 하느니라.”
지난 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보시를 하거나 시주를 하거나 공양을 하는 데에도 세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발심(發心)해서, 두 번째는 상대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세 번째는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달라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다가 아닌 보시라는 것이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유통되고 있는 돈은 잘 돌고 있는 듯 한데 체감으로 느끼는 것은 모두 힘이 든다고 한다. 이곳 사찰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겨울을 지내는데 도움을 주고자 일정 금액의 보시금을 나눠주었더니 크게 기뻐하고 고마워 하는 것을 보았다. 조금만 마음을 더 써주어도 그들 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수출 5천억 불 시대를 살고있다. 세상은 그렇게 확대되어 가고 있는데, 왜 민초들 개개인들에게는 더더욱 옹색해져 가고 있는 것일까? 왜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부자는 더욱 부자로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하게 양분화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절충해 들어가야 할 때이다.
믿음은 마음의 옹색함이나 인색함이 없게 하고, 믿음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믿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게 하고, 믿음은 지혜의 공덕장(功德藏)을 증장(增長)시키고, 믿음은 능히 부처님의 품안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믿음이 원하는 바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게 될 때 한결 같은 어울림을 가지는 데 부족함이 없게 된다. 바라밀다라고 하는 것은 달라고 하는 이가 있든 없든 자신의 마음을 일으켜 하는 것이다. 어머니들 중 자식이 꼭 밥을 달라고 해야 주는 어머니가 있겠는가? 달라고 하기 전에 알아서 챙겨주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내어서 스스로 주는 것이 보시(布施)바라밀다라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야 하고,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좋은 벗과 함께 해야 한다. 두 번째는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배려를 하여야 할 것이다. 받는 기쁨보다 주는 즐거움이 더 큰 것이다. 세 번째는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세상에 스승이 아닌 사람이 없다. 스스로 선근(善根)을 지니고 지혜만 있으면 모두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가르침 아닌 것 없고, 세상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잘못하는 것은 경계로 삼고, 잘 하는 것은 본받는다면 누군들 스승 아닌 이가 있겠는가. 네 번째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함부로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살피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는 부지런히 정진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진지하게 살자는 뜻이기도 하다.
소파 린포체라는 스님은 ‘티베트에서 온 행복의 열쇠’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돕기 위해서 이 소중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 사람은 누구나 다 고귀한 존재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고통과 괴로움은 실어하는 것이 중생심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일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영원한 것일까? 궁극적으로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결국 스님은 참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 하셨다. 요즘말로 하자면 사람답게 살면서 사람노릇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욕심이 성을 일으키고, 성을 내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인데 욕심이 없다는 것은 화를 안 낸다는 것이고, 욕심이 없다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마음속에 고통과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은 누구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불행은 누구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진실로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무서움이 없다. 있는 사람이 더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무서워한다. 삶에 대한 애착도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노인이 더 강함을 본다. 그러므로 어떠한 공포나 두려움은 그릇된 집착, 치우침과 얽매임과 빠짐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 여의게 될 것이다. 분주한 삶 속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한번 들은 다음에는 다시 물러남이 없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생이 무상(無常)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해서 변이(變異)하고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두두물물(頭頭物物)들을 보는 것이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하는 보살행은 발심해서 스스로 환희법열(歡喜法悅)한 상태에서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을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가르침을 아무리 들어도 실증내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하고, 가르침을 받으면 늘 바르게 관찰하고 내관사유(內觀思惟)하는 공부를 해야 하고, 가르침을 따라서 능히 실천하려고 하는 공부를 해야 하고, 깨달음으로 회향하도록 하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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