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깨달음
등록일 : 2006-01-10
지난 일주일간 성도재일을 봉축하는 정진기도를 가졌었다.
절에서의 행동할 때에 필요한 기초예절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님의 정면으로 나있는 문을 어간문이라고 하는데, 어른 스님들만 그 문을 출입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전에 공양물을 올린다던지 할 때에는 예외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부처님의 정면을 피하여 앉거나 예배를 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러나 법회가 있는 날에는 청법을 위해 가운데자리에 앉는 것도 무방하다.
가운데 자리까지 꽉 찰 만큼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그러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포교를 해야 할 것이다. 구지 법당에서만 예배하고 참선하고 기도해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옛 어른들께서는 ‘남들이 잠들 때 함께 잠들고, 남들이 밥상에 앉았을 때 함께 밥상에 앉으면 편리하고 수월하다.’라고 하셨다. 잠이 안 오는데 누워있다고 편안한 것도 아니요, 입맛이 없는데 밥상머리에 앉았다고 배가 부르지도 않는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초심자이고 업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계에 머무르고있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늘 확인하고 다짐하고 인식하는 모습들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하루, 보름, 각종 재일이나 사대 명절인 부처님 탄신일, 출가재일, 성도재일, 열반재일 등의 날들을 정해놓은 뜻일 것이며,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함께 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이 함께 부처님 품안에서 따뜻한 가정을 가꾸어 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가깝던 이들도 종교가 달라지면 조금씩 나누어지고 심지어 가족들 관계 속에서도 그렇게 되면서 배타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되곤 한다. 그래서 인간학을 주창하는 종교이고, 2천 6백여년 동안 단 한번도 종교간 갈등이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법회를 통해서 배우고, 익히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다음에는 합리적인 사고, 선근과 지혜의 덕목을 드러내어 분별해보면 확연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의 덕목이 실현되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이 되기도 한다.

우리 불자들은 불보살님이 왜 중생의 좋아하는 뜻을 따라서 기쁘고 즐겁고 환희법렬하게 하려고 세속의 이치도 알고자 하고, 한결 같은 실상을 통달 하려고 제일가는 이치를 드러내어 알고자도 하는가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몇일 전 신문에서는 네팔의 오지 정글 속에서 한 어린 스님이 7개월째 단식수행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물 한 모금 먹지않고 7개월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경전속에서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 스님은 1년 후에 삼매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예전 원효대사께서는 천공을 잡수셨다고 한다. 티벳의 밀라델빠 스님은 옷 한 벌만을 걸치고 밤에는 영하 40도 가까이 떨어지는 험한 곳에서 평생을 동굴속에서 지내셨다고 한다.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간 것이 없으므로 천공을 잡수셨다고 생각되어진다.
네팔의 그 16세 소년은 “나를 부처라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선정에 들어서 미동도 하지않고 7개월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서 불성자체는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빈부귀천에 관계가 없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어제가 성도재일이었다. 부처님께서 4월 8일에 태어나셔서 29세가 되는 해 2월 8일에 출가를 하셨고 6년동안 설산고행을 하시다 니련선하 강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마왕 파순을 조복받으셨다.
본인은 그 마왕 파순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부처님이 되신 고타마 싯달타는 가비라국의 왕자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출가하신 이후에 어떠한 수행자도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해서는 안 될 그 혹독한 수행을 하실 때에 마왕 파순이 나타나 유혹을 한다. 탐진치 삼독심과 재색식명수 오욕락이 우리를 번뇌 망상으로 어렵게 만드는 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어떠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내가 왕자이며 곧 왕이 되어 잘 살수 있을 것인데 왜 죽음을 무릅쓰고 이러한 힘든 일을 하고있는 것일까’하고 떠오르는 그 생각 생각들이 마왕 파순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기 이전 수행자일 때 부다가야 쪽으로 가는 도중 마갈타국에서 빈비사라왕과 만나서 대화를 하였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아라한과를 얻었는가 아니면 아나함과를 얻었는가?”라 하였다.
싯달타는 “아직 얻지를 못하였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대는 아라한이나 아나함과를 얻지 못했다면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라는 번뇌가 가득할 터인데, 어찌해서 그렇게 교만하고 방자한 것인가.”
싯달타는 “대왕이시여, 내가 지금 탐욕의 결박은 끊지 못했으나 진실로 마음에는 애착심은 없습니다.”라 하였다.
왕은 “어리석은 이여 세상의 신선들도 기운을 삼키고 과일만 먹으면서 사는 이들도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난다는데, 그대는 한창 나이에 젊고 탐욕이 끊어지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애착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라 하였다.
싯달타는 “출가 수행자가 좋은 것을 보고 애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기를 삼키고 과일을 먹으며 힘을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깨끗하지 않음을 보고 알 때에 애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나는 남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 비방을 하지도 않는데 어찌 그러한 삶에 메이겠습니까.”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지켜봐야 할 것이 있다.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있다면 비방도 하겠지만 질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비방할 생각도 없는 것이 불교정신이 아니겠는가 한다.

불보살은 일체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이것을 바라밀다라 한다.
“불자들아 보살이 이런 지혜로 관찰하며 닦는 선근은 모두 일체중생을 구호하며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며 일체중생을 안락케 하며 일체중생을 불쌍히 여기며 일체중생을 성취하며 일체중생을 해탈케 하며 일체중생을 거두어주기 위한 것이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시끄러운 생각이나 괴로움을 여의게 하며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청정함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마음을 조복케 하며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길에 들게 하려는 연고니라.”
결국 여러 사원에서 포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고 정진을 하고, 또 네팔의 한 소년이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는 것을 보면서 출가자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냥 이론적인 현상적인 것으로만 가늠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어진다.
방법은 다양하게 있다.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이치는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절에서 어떠한 기도를 가진다거나 어떠한 법회를 가진다거나 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고, 할 때 같이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산중에서 각각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있는 사부대중이 있고 그 힘과 보살핌으로 불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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