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등록일 : 2006-05-01
오늘 여러분들과 이 법회를 마치면 9월쯤에나 다시 보게 될 듯 하다. 초파일이 지나면 통도사 선원에서 한철동안 수행을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옛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미리 입각지(立脚地: 서있는 자리에서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분명하게 들여다봄)를 세우지 아니하면 삼사십년이 금방 흘러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머리가 쭈뼛이 서고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했던 생각들이 모여서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아야 할 텐데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대충 살게 된다면 또 젊고 건강하고 팔팔한 인생이 남아있는 것처럼 자기 좋은 대로 살다가 후일 불현듯 그런 것을 깨닫게 되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병들고 늙어 안타까운 자기의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살면서 부처님세상 만나기 어렵고, 바른 법 듣기 어렵고, 두려운 마음 일으키기 어렵고, 좋은 나라에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 몸 받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장애자이다. 늙고 병에 드는 것 모두 장애인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장애가 없고, 복 없는 사람은 장애가 많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 장애가 없다는 것은 지혜가 있다는 말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합리적으로 살고 사는 재미를 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금년은 불기 2550년으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연호이다. 실질적으로는 부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오신 날은 2630년 전이다. 그런데도 2550년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께서 35세에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깨우침을 이루셨다. 본래의 성품을 찾아내신 것이다. 그러나 사대육신은 생로병사를 겪을 수 밖에 없는 몸을 지니고 계셨다. 80세에 이르러 육신의 탈을 벗고 청정법신, 원만보신, 천백억화신의 삼신을 나투어 부처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부처님, 그와 같은 부처님의 모습, 불보살님들의 모습 모습에서 실천덕목을 눈여겨보고 지켜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우리도 헝클어져 있는 삶의 현장에서 실타래를 풀 듯 풀어야 할 것이다.
불보살님들이 좋아하는 열 가지 모습이 있다.
“불자들아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좋아함이 있으니, 이른바 바른 생각을 좋아하니 마음이 산란치 않은 연고며, 지혜를 좋아하니 모든 법을 분별하는 연고며, 모든 부처님계신데 가기를 좋아하니 법문듣기에 만족함이 없는 연고며, 모든 부처님을 좋아하니 시방에 가득하여 가이없는 연고며, 보살을 좋아하니 자재하게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문으로 몸을 나투시는 연고며, 모든 삼매문을 좋아하니 한 선정삼매문에서 모든 삼매문에 들어가는 연고며, 다라니를 좋아하니 업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여 중생에게 주는 연고며, 걸림 없는 변재를 좋아하니 한 글자와 한 글귀의 가르침을 말할 수 없는 시간동안에 분별하여 연설하되 다함이 없는 연고며, 바른 깨달음 이룸을 좋아하니 일체중생을 위하여 한량이 없는 문으로 몸을 나투어 바른 깨달음 이룸을 보이시는 연고며, 법륜 굴리기를 좋아하니 온갖 삿된 외도의 법을 끊어버리는 연고니라.”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달음을 이룬지 20년쯤 지났을 때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누가 나를 좌우에서 보필하면서도 좋은 이익을 잃지 않겠는가?”
부처님을 보필하는 것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놓친다든지,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보필하면서도 좋은 이익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이곳 일산에도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치 농한기의 농부들처럼 다음의 생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 어른들을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집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농한기에 농부들이 농사짓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많이 있듯이 도회지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서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스스로 그것을 절감하고 있다. 지금 서있는 바로 그자리, 입각지(立脚地)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잘 정리해볼 필요가 잇다.
며칠 전 모 신문사에 기고한 글이 있다.
‘달라이라마께서 어느 철학자가 와서 “불교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불교는 과학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불교는 인생인데 왜 불교를 과학이라고 한 것일까?
그렇다면 만약 과학자가 와서 같은 질문을 했다면 불교를 철학이라고 대답하셨으리라. 왜냐하면 과학이라고 하는 객관성과 철학이라고 하는 주관성을 사용해야 불교를 이해 시킬 수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리모콘 시대, 클릭 시대이다. 옛날에는 게을러서인지 채널 돌리기도 귀찮은지 한 채널을 맞춰놓으면 재미가 있든지 없든지 그냥 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차없이 채널을 돌려버린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채널은 고정시켜놓고 바꾸려하지 않는 것인가.
선가구감에도 인생을 살면서 고비 고비가 많다. 한 고비를 넘었다고 해서 또 다른 고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고 하는데, 설혹 금생에 나를 확연하게 드러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눈 감을 때에 초라한 모습, 안타까운 모습, 비참한 모습, 서글픈 모습, 어줍지 않은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당했던 나의 부모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시기에 가서 나약하고 위약하고 심약한 모습이 아니라. 인과를 확실히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정립했다면, 세상을 당당하고 떳떳한 인생을 살기위해 노력한 모습이 있다면, 본전치기만 해도 인간세상에 다시 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업력으로 윤회한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오다가다 사람으로 온 것이 아니다. 금생의 생을 마감하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뜬구름 같은 인생이 아니라 점지 되어져 있고, 확실한 믿음과 신념이 드러날 수 있는 자기 삶을 살았다면 우리에게 흔들림은 없을 것이다.
같은 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 생에 또 만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안목이 없고 눈이 밝지 못해서 못 알아볼 뿐이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요 욕지내생사 금생작자시(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라 하였다.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자신이 처해있는 것을 보고,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인들은 무학자(無學者)를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무심(無心)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마음 없는 마음을 마음이라는 그 마음이 참마음이라고 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결국 무심한 마음이며, 그 무심한 마음을 한결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시비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시며 설법하셨던 곳이 기원정사이다. 부처님께서 그 곳에 계실 때에 있었던 일이다.
많은 제자들이 모여서 먹고, 입고 사는 이야기, 의협심을 드러내어 불의와 싸운 이야기 등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그런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하고 착한 일도 아니다. 그런 일들로 수행 정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고싶다면 생명의 실상인 법의 공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바라밀적인 보살행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욕심을 적게 해서 만족할 줄을 알고, 불퇴전의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는 용맹심을 가지며, 어떻게 하면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력 있는 가르침을 전해서 훗날 나고 죽음이나 병약하고 심약해서 벌벌 떠는 삶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가지게 할 것이고, 장애가 없도록 할 것인가를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스스로 마음을 내어서 자기가 한 선행을 자기조차 모를 만큼 생활화 되어있는 사람들도 있다. 전혀 내세우지 않고, 전혀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만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선한 행위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일들을 우리가 하여야 한다.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여야 한다.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동쪽으로 쓰러지고, 서쪽으로 기운 나무는 서쪽으로 쓰러지듯 맑고 깨끗하고 품격있는 삶의 현장에 어울림을 가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쳐주고 일깨워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바로 보살이 좋아하는 일들이다. 바른 생각을 좋아하니까 마음이 산란치 않고, 지혜를 좋아하니까 이치를 분별할 줄 알고, 부처님 계신곳을 좋아하니까 기도도 하고 청법도 하는 것이다.
항상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인생은 꿈과 같은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는 말도 있다. 꿈속에서는 꿈이 꿈인지 모르는 경우가 아주 많다. 또 요즘은 사이버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이 현실과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미움은 줄이고, 치우치고 얽매이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하고, 모든 이들에게 따뜻이 대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사랑과 자비로 대하게 되면 꿈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긍정적인 생각을 늘 유지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핵심이 되고, 그것이 바로 참된 부처와 함께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면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부처성품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처성품을 확연하게 드러내신 부처님께 귀의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숙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불자의 길, 생활불교를 할 수 있는 참모습을 지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좋지않은 법, 불필요한 것은 나로부터 파생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불자가 닦아가야 할 공부의 덕목이요, 좋은 가르침 생명력있는 감로법은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 단 한 말씀이라도 불자들이 수지하고 간직하였으면, 반드시 나눔을 통해서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의 마음인 보리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 불자 모두는 첫째로 가까이에 좋은 벗을 두고 살자. 좋은 벗이란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손자, 그리고 나의 이웃이다. 둘째, 성내는 마음을 여의어야 한다. 성내는 마음이란 어리석어서 생기는 현상으로 다툼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셋째,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또 서로 소중한 줄을 알고, 서로 귀한 줄을 알고, 서로 불쌍한 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부지런해야 한다.
만일 불자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되면 모든 불보살님의 위 없는 법의 환희법열한 즐거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마음이 트이기만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그 무엇에도 걸리거나 장애 되지 않고 잘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자! 길을 떠나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 있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하자. 모든 이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자. 갔던 길로 되돌아오지 말고 두 사람이 함께 가지도 말자. 나도 우르벨라 병장촌 고행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법을 설하리라.”는 말씀을 우리 가족과 이웃들에게 전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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