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이렇게 보면. 1기인생, 2기인생, 3기인생으로 크게 나누면 나눠질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생과 사지만. 생과 사라는 것은 생로병사지만, 우리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고, 전생에서 금생으로, 금생에서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것처럼 저 한강물이 북한강, 남한강에서 저 인천앞바다로 오대양육대주가 이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맞물려있는 것이 시간이고 그런 개념이 인생이라고 생각해보면 크게 나눌 것도 없지만 보면 그렇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삼십년 준비해서 이삼십년 사회에서 어울림을 가지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이삼십년을 살면.
우리는 언제죽을까? 언제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오늘을 살다가 가는거지요. 어제는 살았던 시간일 뿐이고. 오늘을 살고, 내일도. 내일은 있지만 그 내일은 영원히 만날수 없는 내일일 뿐입니다. 내일도 다가오면 오늘이다. 그러니까 십년 있다 세상을 떠나든. 삼십년있다 세상을 떠나든 떠나는 그날이 오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오늘을 살다가 오늘 죽게 되는데. 죽는다 그러니까 좀 그렇죠. 찜찜하지. 응 생각씹은 것 처럼 맛이 이상하잖습니까.
며느리좀 일찍 얻으면 부엌좀 일찍 내주고, 늦게 얻으면 뭐 평생도 하고 그러는건데. 그것가지고 세상을 꼭 평가하고 규정지어서 이렇다고 결론지을수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물질로 이루어져있는 이 현상은 그 순도가 높다는 금도 99.99이고 0.001퍼샌트는 이물질이다. 그런거니까. 평상시는 온전히 갖혀져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쪽으로 근사치로 1퍼샌트라도 장점이 있는가. 또 좋은 모습이 있는가. 이런게 매우 중요할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가 불교가 뮙니까 물으면 짧은시간에 대답할 때 불교는 인간학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불교는 인간학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이 인간인가 하면 부처님 같은 모습인데, 부처님 같은 모습을 우리 범부중생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접근해서 표현할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가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떨고있을 때,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이내 잠드는 것처럼, 편안해지고 눈물을 그치는 것처럼, 우리가 부처님을 향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죠. 부처님이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하고, 온화하고, 너그럽고, 포근하고, 이런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처님의 제자들도 결국은 세상살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온화한 마음으로 안아주는 거지요.
요즘은 세계적으로 안기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끌어안기운동. 서양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안기운동. 안아주기운동. 결국 관심과 배려와 친절함속에서 어울림을 가지자는 그런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심이고,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성건이 있는 몸짓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살면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다 번거롭습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또한 맑고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 하는 운동이 맑고 향기롭게 입니다. 통증과 고통의 차이점. 통증도 고통이고, 고통도 통증인데. 통증은 자신과 아무상관없이 오는 것. 늙고 병들고 하면 다 옵니다. 근데 그것을 통증을 통증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통증에다 조미료를 치거나 마음을 잘못 움직이면 고통이 수반됩니다.
염염보리심이면 첫차가 안락국이다. 생각생각이 보리심을 놓지 않으면 상속되어지면 곳곳이 다 안락국이다. 극락정토다. 염염삼독심이면 첫차가 삼악도이다. 삼악도는 지옥, 아비, 축생이다. 삼독심을 지니고 있는 그 자리가 삼악도이다. 보리심을 지니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안락국이다. 안락국이라는것이 바로 편안하고, 넉넉하고, 따뜻한 곳이다.
십시일반이라고 상차려놓았다가 갑자기 사람하나 나타나면 수저하나만 더 놓고 밥한공기만 더 놓으면 밥다시 할것이 없다. 그 밥 나눠먹으면 된다. 그런것을 조화롭게 이루는 관계, 그런 어울림속에서 우리가 내모습을 잃지않는 나. 이런것들이 이루어 질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와 같은 시간이고, 기도하는 시간이고, 기도정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자기도리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불교는 자기도리. 내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고, 자기도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 불교라는 가르침이 우리들의 인생에 어떤 역활이 가장 좋을까. 나를 보면, 우리를 만나면 또 절에 오면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앞에 합장했을 때,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우리가 느끼고, 이해되고 가름해서 행동하면서도 늘 훈훈할수 있는 것은 윤활유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타민적인 것이다. 통증과 고통의 나눔속에서 통증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이 병이 아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은 병든사람이지만, 아펐어도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노환이다. 노인이 병든 것은 근심이다. 그것을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통증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있어서는 안될것이 생긴다고 가미하면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해서 병이 드는 것이다.
절에 처음 스님들이오면 초발심자격문이라는 책이 있는데, 첫날배우는 첫구절에 수오개십개등하야 선지지범개차올이라. 절에 처음온 불자는 오개십개등을 받아 지니되 그것을 잘 가지고 범할줄도 알고, 열어줄줄도 알고 막아줄줄도 알아야 한다.
하나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그게 산수이다. 수학이다. 하나더하기 하나는 둘인데, 불교라는 종교가 원하는 둘은 넷에서 둘빼도 둘이라는 것이다. 하나더하기 하나만 둘이 아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하나더하기 하나만 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자기도리를 가르치고, 자기도리를 행사할수 있는 그런, 보편적이면서 상식적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범주를 벗어나가지고 따로 별도로 단을 잡아놓은 것이 아니다. 고로 능엄경에보면 견견지시에 견비시견이라는 말이 있다. 볼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이말을 응용해보면, 줄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갈것을 가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다. 즉 당연히 할 것을 하는 것은 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은 자기도리를 하는 사람이 되기위해서 불교가 나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고로 우리들은 그런 부분들을 잘 챙기고 살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될수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지나간 시간에 연연하지 말고, 그것을 붙들려고 접어가지고 다시시작한다 그것은 절대 될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결국 법문을 청법하고, 기도를 하고, 참회를 하고, 정진을 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집착하지 않는 삶. 자유로운 삶. 안가면 불안하고 갔다오면 허전하고 허망한 인생이 아니라, 기쁜마음으로 봉은사에 오셨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쁜마음으로 출근하고 기쁜마음으로 우리가 집을 출발해서 학교도 가고, 직장도 가고, 볼일도 보고, 절에도 오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불자.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생활불교속의 참신앙, 참인간을 구현하고자 하는 불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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